소금앙버터빵이 맛있는 Oven Spring

17년쯤 전인가, 이 동네에 이사 왔을 때만 해도 호수 공원 주위에  조성된 상가 건물의 공실률이 거의 95프로 수준이었다.
대단위 신도시급 아파트 단지를 개발하면서  개발이익에 눈이 먼 업자와 행정당국의 결탁이  있었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 촌구석에 이렇게 큰 규모의 상가가 어찌 지어질 수 있었겠나~~
호수공원을 산책할 때마다 텅텅 빈 상가를 보면서 상가 주인들은 얼마나 힘들까 괜한 걱정을 하기도 했었다.
건물주, 하다 못해 상가주인이라도 되는 게 대한민국에 사는 대다수 중산층들의 세속적 욕망이 아니던가!
나도 한 때 그런 욕망을 가져 보았기에 상가주인에 감정이입하며 내가 분양사기라도 당한 듯 마음이 안 좋았다.
이제 와 돈 모을 기회가 사라지니 욕망도 없어지고 욕망이 없으니 내 마음도 평온하다.
가진 범위 안에서 어찌어찌 살아가는 일이 전부다 보니 가진 자들의 욕망 좌절이 머 그리 대수인가 싶다.
암튼 그 많던 빈 상가가 코로나 시국을 거치면서 호수공원 주위로 카페가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열 곳도 넘게 카페 거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산책 나왔다가 가끔씩 카페에 들러 커피 한잔 마시는 게  소소한 낙이 되었다.
내 성격상 이곳저곳  여러 곳을 다니지는 않지만 세 군데 정도를  전전하고 있다.
오늘, 비 오는 호수공원을 산책하며 들른 카페는 소금앙버터빵이 맛있는 오븐 스프링이다.
이 집은 직접 빵을 만들어 내는 베이커리 카페이다. 커피  한잔만으론 부족할 때는 빵이 맛있는 오븐 스프링에서 무료한 오후의 시간을 보낸다.
혹자는 멀쩡한 집 놔두고 혼자서 무슨 카페냐고 하겠지. 나 역시 그럴싸한 이유를 댈 수는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글쓰기가 잘된다는 것.  블로그에 쓴 많은 글들이 카페에서 작성되었으니 말이다.
앞으로 이 동네 카페를 전전하며 카페 순례기를 써 보려 한다.
광고 일도 없는 동네카페 예찬론이다^^


Posted by 구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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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대한민국 대표 국민 간식 호떡 만들기에 도전해 보았다.
내가 사는 동네엔 호떡 포장마차가 없다.
언젠가부터 호떡장사를 볼 수가 없는 거다.
계란프라이 용도로 구입한 3구짜리 프라이팬을 보고 있자니 호떡 생각이 났다.
모임에서 지인이 아프리카 여행 다녀온 후기를 얘기하면서 현지인들이 밀가루 반죽으로 화덕에 구워 먹던 빵맛이 그리워 집에서 이스트 넣고 밀가루 반죽 발효시켜 프라이팬에 구워 먹었더니 맛있더라는 얘길 듣고 나 역시 예전 실크로드 여행 갔을 때 먹었던 단순한 밀가루 빵, 난이 별미였던 기억이 되살아 났다.
밀가루에 이스트 넣고 발효시켜 난 비스무리한 걸 구웠다가 그럴 바엔 호떡을 만들자!  

재료준비
밀가루 계량컵으로 수북이 두 컵,
찹쌀가루 2스푼, 소금 1 작은 스푼, 설탕 4 작은 스푼, 미지근하게 데운 우유 한 컵, 올리브유 1스푼, 플레인요구르트 2스푼
모두 섞어서 질척한 정도로 반죽되도록 필요하면 미지근한 물 첨가한다.
반죽을 랩으로 덮어 따뜻한 곳에서 발효시켜 준다.
호떡소는 설탕, 계핏가루, 다진 견과류를 적당히 섞어서 준비해 둔다.

네 시간 정도 발효시켰더니 충분히 부풀어 올랐다.

반죽에 서툰 솜씨로 설탕믹스를 넣고 요령껏 구워낸다.

반죽이 너무 질어서 밀가루 조금 추가해서 호떡 7개 완성!
너무 맛있어서 나도 깜짝 놀랐다.ㅋㅋ
요리는 감이다^^
위 레시피는 걍 내맘대로 레시피, 맛있으니 앞으론 이 레시피대로 하면 될듯!

변명
친구가 호떡 사진 보더니 태웠다고하는데 저얼~때 때운거 아님! 맹세코!
사진이 그렇게 나온 거임ㅠㅠ


Posted by 구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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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소위 대다수의 '58년 개띠'가 대학생이 되던 해 대학가요제가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때는 바야흐로 유신말기,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체제에 대한 반기를 억누르기에 급급했던 독재정권하에서 대학가요제는 대학생들에겐 하나의 숨통 같은 이벤트가 아니었을까?
앞서도 말했지만 내가 찜한 '나 어떡해'가 그해의 대상곡이 되었다.
이 곡을 작곡한 이가 결성한 밴드 산울림의 '아니 벌써'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것도 그 당시 사회분위기를 반영했다고 본다.
https://youtu.be/79E5IDyg1vo?si=3krnWKbc7Dz4ngjC

대학가요제에 참가하여 한가로이 노래나 부르는 게 대학생들에게 허락된 축제였지만 그 와중에 젊음은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시대는 암울했고 그들의 노래는 내겐 너무 벅찼다.
2학년 학기 초에  연극 '피의 결혼'을 보았다.
학교 연극 동아리의 공연이라 부실하기 짝이 없었지만 스쿨밴드가 배경음악으로 연주한 deep purple의  'april'이라는 곡은 어설픈 연주실력에도  강열한 여운을 남겼다.
https://youtu.be/dArllMPLPLE?si=bS0FJ3Yhx9I9xBLX

때는, 젊은 시절 가슴 뛰게 좋아했던 계절 '잔인한 4월'이었다.
사월이 좋았다. 산들산들 4월의 봄바람은 일탈을 꿈꾸며 삐뚤어지고픈 설렘을 부추겼다.
태생이 소심하여 항상 제자리였지만 마음만은 그랬다는 이야기이다.
4월이 혁명의 계절인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용감해지기 좋은 계절 4월!
1979년도 그랬다.
민주화 열기로 4월부터 달궈지기 시작한 사회 분위기는 절정을 향해가고 있었다.
1978년 대학가요제에서 수상은 못했지만  '그때 그 사람'은 그 어떤 곡보다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1979년 그날, 대통령이  술자리에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사망하던 날, 술자리에 '그때 그 사람'을 부르라고 또 술 시중을 위해 딸 같은 여대생 둘을 불렀다. 대통령이  술자리서 저격 당해 죽었다는 사실보다 더 수치스러운 사건이었다.
1979년 민주화의 열기가 대통령 시해로 풍선에 바람 빠지듯 허무하게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 유신의 잔당 신군부가 잉태되고 있었고 1980년 다시 혁명의 기운을 안고 봄이 왔으나 그 봄은 무참히 더 악랄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그 해 5월 서울의 대다수 대학생들이  최루탄이 난무하는 종로 거리를 지나 서울역으로 행진하며  외쳤던  '전두환은 물러나라'는  구호는 광주에서 피의 학살로 묻히고  1980 년 서울의 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영화 '서울의 봄'을 보았다
43년 전 봄 맡았던 최루탄의 냄새를 떠올려 본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힘은 소수의 권력에 대한 집요한 욕망이지 대다수 시민의 순진한 대의명분이 아님을 그때는 몰랐다.
https://youtu.be/v7gu9tdGMsA?si=useyx38b7kz8sNyo



Posted by 구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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