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소위 대다수의 '58년 개띠'가 대학생이 되던 해 대학가요제가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때는 바야흐로 유신말기,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체제에 대한 반기를 억누르기에 급급했던 독재정권하에서 대학가요제는 대학생들에겐 하나의 숨통 같은 이벤트가 아니었을까?
앞서도 말했지만 내가 찜한 '나 어떡해'가 그해의 대상곡이 되었다.
이 곡을 작곡한 이가 결성한 밴드 산울림의 '아니 벌써'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것도 그 당시 사회분위기를 반영했다고 본다.
https://youtu.be/79E5IDyg1vo?si=3krnWKbc7Dz4ngjC

대학가요제에 참가하여 한가로이 노래나 부르는 게 대학생들에게 허락된 축제였지만 그 와중에 젊음은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시대는 암울했고 그들의 노래는 내겐 너무 벅찼다.
2학년 학기 초에  연극 '피의 결혼'을 보았다.
학교 연극 동아리의 공연이라 부실하기 짝이 없었지만 스쿨밴드가 배경음악으로 연주한 deep purple의  'april'이라는 곡은 어설픈 연주실력에도  강열한 여운을 남겼다.
https://youtu.be/dArllMPLPLE?si=bS0FJ3Yhx9I9xBLX

때는, 젊은 시절 가슴 뛰게 좋아했던 계절 '잔인한 4월'이었다.
사월이 좋았다. 산들산들 4월의 봄바람은 일탈을 꿈꾸며 삐뚤어지고픈 설렘을 부추겼다.
태생이 소심하여 항상 제자리였지만 마음만은 그랬다는 이야기이다.
4월이 혁명의 계절인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용감해지기 좋은 계절 4월!
1979년도 그랬다.
민주화 열기로 4월부터 달궈지기 시작한 사회 분위기는 절정을 향해가고 있었다.
1978년 대학가요제에서 수상은 못했지만  '그때 그 사람'은 그 어떤 곡보다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1979년 그날, 대통령이  술자리에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사망하던 날, 술자리에 '그때 그 사람'을 부르라고 또 술 시중을 위해 딸 같은 여대생 둘을 불렀다. 대통령이  술자리서 저격 당해 죽었다는 사실보다 더 수치스러운 사건이었다.
1979년 민주화의 열기가 대통령 시해로 풍선에 바람 빠지듯 허무하게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 유신의 잔당 신군부가 잉태되고 있었고 1980년 다시 혁명의 기운을 안고 봄이 왔으나 그 봄은 무참히 더 악랄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그 해 5월 서울의 대다수 대학생들이  최루탄이 난무하는 종로 거리를 지나 서울역으로 행진하며  외쳤던  '전두환은 물러나라'는  구호는 광주에서 피의 학살로 묻히고  1980 년 서울의 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영화 '서울의 봄'을 보았다
43년 전 봄 맡았던 최루탄의 냄새를 떠올려 본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힘은 소수의 권력에 대한 집요한 욕망이지 대다수 시민의 순진한 대의명분이 아님을 그때는 몰랐다.
https://youtu.be/v7gu9tdGMsA?si=useyx38b7kz8sNyo



Posted by 구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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